글
비람
2018. 9. 16. 12:52
나의 서사는 재앙 한 편에 들어 있었다.
"어제부터 느낀거지만.. 시답지 않은 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군요. 거짓으로 시작한 사람을 이제와서 믿어달라.. 그 소리인가요? 넌 모든 걸 알고 있었죠? 인공적으로 이능력자를 만들어내는 실험도.. 아,"
어쩌면 우리가 실험체가 될지도 모른단 것까지 말이죠.
"우린 너한테 있어서 살아있는 표본.. 관찰대상 그 정도밖에 안됐던것 아닙니까? 니가 적어도 우릴 동료라고 생각하고 믿었더라면 진실은 니 입으로 밝혔어야겠죠. 우리가 확인하고, 맞냐 아니냐를 묻기전에 니 입으로 말이에요."
넌 우릴 믿지 않았어요.
"그런 너한테 내가 무슨 믿음을 주란 겁니까."
모든 여름을 떠나보낸 서늘한 가을바람보다 더 차가운 말들이 심장으로 쏟아져 내린다. 비는 그쳤는데, 심장 위로 떨어져 내리는 폭우는 채 그칠 줄을 모른다. 이 서글픈 비의 계절은 어디쯤에서 몰려온 것일까.
쏟아지는 말들에 입을 다물고, 허공으로 흩어지는 담배연기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토파즈색 눈동자와 바람에 흐드러지는 새하얀 머리카락을 바라본다.
ㅡ각오했던 일이다. 첫 조사를 나가던 날부터, 몇 번이고 모든 것을 밝힐까 고민하면서도 끝끝내 입을 다물며, 그저 심판의 날까지 진실을 연기해오던, 낡고 지친 하찮은 각오. 모든 이들의 분노와 원망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감히 나라는 인간은 해서는 안 되었을 다짐.
"...과거의 잘못을 숨기고 싶었습니다. 더러운 레이번 데이우드가 아니라, 깨끗한 데이브라는 인간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숨겼습니다. 하지만 당신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는 조금의 거짓도 없었습니다. 저는 당신들에게 최선을 다했고, 당신들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생활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저만 입다물면 이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최후의 생존자인 나 하나만 입 다물면 되는 일이었다. 나라는, 하찮은 소시민 하나만 입을 다물면 세상은 평화롭게 돌아간다. 어제의 이웃이 오늘 사라져도 금방 그는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거리에서 동냥을 하던 이가 사라지는 것을 신경쓰는 이는 없다. 삐그덕거리는 것 같으면서도, 세계는 평화롭게 돌아간다.
"인공적으로 이능력을 만들어내는 실험은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K21이 성공했었다는 것까지. 하지만 섹터E 폭파 사건 이후로 모드 것이 그 불길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제 동료도, 모든 연구 기록들도, 유일하게 성공했던 그것도. ㅡ저는 그렇게 생각했고, 주변의 모든 정황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15년 전의 재앙은 내 서사의 한 편이었다. 새드 엔딩. 슬픈 결말로 끝난 스무 살의 서사.
"그러니 최근에 다시 시작된 실험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조사를 가서 알게 된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그 명단에는 저도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제 휘하에 있는 당신들을 제가 표본, 관찰대상으로 생각할 이유는 조금도 없어요. 저는 그 날 이후 모든 실험에서 손을 뗐고, 그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으니까요."
내 무지(無知)의 죄마저 따져 묻겠다면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요.
"믿었냐고요? 믿었습니다. 상부에 보고를 올리고, 데이비드의 입에서 말이 나오고, 우리가 모든 진실을 마주하기로 결심했을 때 조차도요. 저는 모든 순간에 여러분을 믿었습니다. 진실을 제 입으로 밝히지 못한 건 미안합니다. 당신들에게는 제게 기만당했다 생각했을 지 모르지만, 저는 제 입으로 모든 걸 밝히고 모두를 잃는 것이 너무도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밝혀지는 순간까지 또 진실을 미루고 미뤘습니다. ...미안합니다."
재앙이 끝나던 날, 모든 것을 잃었다. 그로부터 15년. 오랜만에 마음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이들을 만났다. 쉽게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 같은 강한 사람들. 내 입으로 내 치부를 밝히고 싶지 않았다.
오만이었다.
더러운 과거를 숨기고 모두와 계속 함께하고 싶었다.
욕심이었다.
오만과 욕심은 또 다시 내 서사 한 편에 재앙을 쓴다. 아니 어쩌면,
내 서사는 재앙의 한 편에 속해있는 건지도 모른다.
"제 욕심으로 믿어달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그 어떤 말로도 믿음에 대한 배신에 대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감히 당신께 아주 실오라기 같은 믿음을 구합니다."
...저를 데이브로, 동료로서 받아들여주세요, 네비아 노데.
나는 재앙 속에서 단 하나의 빛이라도 구걸해야 했다.